추억 록스타, 내가 돈이 없지 가오(かお)가 없나

아시아 록스타
군용 지프를 민간용으로 만든 아시아 록스타

산책을 나갔다. 한동안 꾸준히 산책을 했으나 날이 더워지면서 등한시 했더니 기력이 영 시원찮다. 확실히 용불용설(用不用說)은 옳다.

오랜만에 나왔으니 좀 오래 걸어볼 요량으로 큰 타원형으로 멀리 코스를 잡았다. 그러자면 도로를 접하는 인도를 좀 걸어야 한다. 그렇게 타박타박 걸어 도로변까지 나오게 되었다. 도로가 있는 곳까지 나와 보니 차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신호에 걸려있다. 하얀 사탕, 검은 사탕, 간혹 은색사탕······.

그렇게 차들을 구경하며 걷는데 저만치 담녹색 자가용이 눈에 들어온다. 1996년식 볼보 세단이다. 96년형 볼보850은 헤드라이트에 와이퍼가 달려있어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차들은 바깥의 더운 공기가 들어올세라 창문을 꼭 닫고 있는데 튼튼하기로 둘째가면 서러워한다는 이 볼보만 창문을 활짝 내리고 있다.

흰색 아니면 검은색인 차들 사이에서 이 볼보만 진한 녹색인데,  공기저항계수를 무시한 각진 모습이지, 에어컨도 없는지 창문을 활짝 열어놨지, 헤드라이트에 와이퍼는 달려 있지, 이래저래 눈에 확~ 뜨인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운전석의 젊은 운전자가 잘 보였는데,  그는 모양 빠지게 비지땀을 흘리면서 신호등이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친구, 이 날씨에 에어컨도 안 켜고···”

그러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초록사탕에서 예전 내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애마는 20년 된 SUV이다. 사람으로 치면 백 살이 훨씬 넘은 영감탱이 차로 그저 근처 마트에 장보러 갈 때나 이용하는 중이다. 이전엔 록스타(ROCSTA) 그 이전엔 로얄 살롱(Royale Salon)이 나의 애마였다.

첫차였던 로얄 살롱은 기름 먹는 하마였다는 기억밖에 없지만, 두 번째 차였던 록스타는 참 많은 추억거리를 제공했었다. 군용차량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록스타는 달리는 기능에만 충실한 차량이어서 운전자를 위한 편의장치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그러다보니 생겨난 에피소드들이다.

어느 여름날, 인근 도시로 볼일을 보러 갔다. 마이카 시대에 접어든 탓인지 아니면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도로위엔 차들이 빽빽했는데 모두들 창문을 꼭 닫고 있었다. 에어컨을 켰다 이거지. 나의 록스타는 에어컨이 없었는데 나는 그런 사정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에 한 여름에도 창문을 닫고 다녔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그날은 정말 견딜 수 없이 더웠고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에 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고속도로에만 올리면 창문을 좀 내릴 여유가 있겠지 하는 바람을 품고서.

거북이걸음으로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버튼을 누르면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우아하게 도로비를 척~ 계산하는 것이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림처럼 되지 않으리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록스타에는 창문을 스르륵 내려주는 버튼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방금 창문을 연 것처럼 열고서 진입을 할까, 아니면 그동안 갈고닦은 신공을 발휘해서 창문을 스르륵 열까.

그동안 버튼을 눌러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난 부단히 노력을 했었다. 뭔가가 작동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어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왼쪽 손목만 이용해서 레버를 일정한 속도로 돌려 스르륵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

나의 결정이 늦었던 탓에 내가 도로비를 계산할 차례가 되었고, 나는 신공을 발휘해야 했다. 손목을 부드럽게 움직여 일정한 속도로 창문을 내려 도로비를 계산하고 나오는데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띠~ 얼굴에 범벅이 된 땀을 닦지 않았다. “아우~ 쪽팔려, 에어컨 없이 창문 닫고 있었던 거 알았겠네.”

뭣 땜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남의 눈을 정말 많이 의식 했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없애자는 캠페인도 하고 그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남들은 그런 것을 나쁘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가오(かお)가 있어야 한다. 똥폼이나 허세로 해석이 되는 가오는 달리 보면 자존심과도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가오가 없는 사람은 비굴해지기 마련이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존심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다. 다시 한번 외쳐본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모처럼 산책 나와서 별 생각을 다했다. 내가 보기에 진한 녹색 볼보를 타고 있던 운전자는 돈은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오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 차가 기름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 그 정도 차를 타면 창문을 닫고 버텼어야지.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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