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볼 자료가 있어서 공공도서관에 갔다. 언제나 그렇듯 도서관 주차장은 항시 만차(滿車)다. 도로변에도 차들이 조밀하게 서있고 도서관 주변 주택가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차들도 도서관을 좋아하는가보다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어쩌면 산을 좋아하는 차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도서관 바로 위에 인천의 명산이 있으니 도서관에 차를 주차해두고 산행을 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집에서부터 걷기엔 제법 먼 거리에 있는 공공도서관. 주차장 사정이 이러하니 도서관에 갈 때면 난 언제나 걷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큰 배낭하나 짊어지고 레몬수 한 병 들고 걸어가는 도서관행은 언제나 즐겁다.
마음이 우울하여 햇볕을 벗 삼아 걷고 싶을 때, 수천 권의 책 냄새를 한꺼번에 맡고 싶어질 때, 몸과 마음이 게을러져서 적당한 긴장 속에 나를 거(居)하고 싶을 때 도서관에 가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해결이 된다. 세상과 격리되어 책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그런 면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다.
강한 햇볕을 받아 파릇파릇하게 힘이 생기고 매일 매일 튼튼해져가는 가로수 잎사귀들을 보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고, 쌕쌕거리며 주인 옆에서 발발거리며 걸어가는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은 자리에서 27년째 맛있는 호떡을 구워 파시는 호떡 할아버지를 보면 달콤한 호떡에 군침이 저절로 돌고, 관절염 때문에 너무 아파서 햇빛을 보려고 찐 옥수수 장사를 33년째 하고 계시는 옥수수할머니를 보면 건강하게 사시는 지혜를 배운다.
당신이 파는 천 원에 세 개짜리 꽈배기 도넛보다 시골에 계신 늙으신 엄마가 만들어주신 쑥모시떡과 집된장이 비싼데도 훨씬 더 잘 팔린다는 꽈배기 아저씨를 보면 솜씨 좋고 건강하신 어머니가 함께 하심에 한없이 부럽고, 그늘 좋은 의자에 앉아 운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졸멍 쉬멍 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걷다보면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도서관에 도착한다.
공공도서관은 입구에서부터 초록의 푸르름으로 눈부시다. 고등학교 때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던 이양하의 수필이 문득 떠오른다. 5월의 신록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했던 신록예찬!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리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듯하지 아니한가? ······ (이하 생략)
신록예찬/이양하/1937
녹음에 취해 잠시 도서관 입구에 서있는데 주차선 아닌 곳에 서있는 작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아기 띠를 맨 젊은 애기엄마가 차에서 나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무심히 지나쳐 도서관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시동이 켜진 차안에 이제 두 돌이 지났을법한 어린 아기가 카시트 안에서 쌕쌕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기엄마가 시동을 켜놓고 달음박질쳐 도서관안으로 뛰어 들어간걸 보면 아주 급한 일이 있었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차 안에 창문을 다 닫아놓고 아기만 차 안에 두다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래서 아이한테 무슨 변화가 생길까봐 차 안을 확인하며 아기엄마가 빨리 오기를 도서관 문을 노려보면서 기다렸다.
금방 올 줄 알았던 아기엄마는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 시간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던지 길 가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아 차 안의 아기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도서관으로 뛰어가 아기엄마를 찾아 데려오고 싶었다. 시동이 켜져 있어 붕붕거리는 차를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낏거렸다.
차 안의 온도가 뜨거워졌을 텐데 아기는 괜찮나? 창문에 가까이 가서 아이상태를 보니 다행히 아이는 쌕쌕 자고 있다. 그대로 두면 안 되지 싶어 문을 열려는 순간 멀리서 아기엄마가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기를 혼자 차안에 두고 이렇게 오랜 시간 딴 곳에 계시면 어떡해요? 더구나 시동도 켜놓고 창문도 닫아놓고······”
“책 반납하느라···”
젊은 아기엄마가 해맑은 얼굴로 말한다.
“책 반납이 대순가요? 이런 일이 얼마나 위험한···”
젊은 아기엄마에게 내 말이 잔소리로 들렸나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쌩하니 가버린다.
아기엄마가 잘못을 깨달아 부끄러운 마음에 급히 자리를 뜬 거라면 좋겠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울 할머니들처럼 늙나?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지지? 그래도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이 나이가 되어보니 무슨 말인지 더 절실히 공감이 된다. 초록은 동색이다.
놀란 심장을 토닥토닥하면서 도서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도서관밖에 서 있었다. 책 밖에서 배우는 특별한 경험을 한 채 한참을 도서관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신록이 눈부신 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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