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긴 연휴 기간에 케이블TV에서 드라마 미생을 전편 방영하여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 시청 후기는 별도의 공간에 작성했지만, 극중 대사 가운데 강하게 뇌리에 박히는 것이 있었다. 인턴사원 안영미(강소라)가 승인되지 않은 기획안에 대하여 재무부장(황석정)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 장면을 잠시 소개하면, 재무부장이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을 찾아온 인턴사원 안영미를 질책하고, 그 벌로 왜 기획안을 승인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재무팀의 입장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한다. 그러자 안영미는 흔쾌히 수락하였으나 결국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고, 왜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안영미: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예 모르겠습니다. 그럴듯하게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만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재무부장: 음, 실망인데. 그래도 당신 정도라면 그 시간을 들여서 그런 허망한 결론을 내릴 것 같지는 않은데…
안영미: 쓰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느낀 지점은 있었습니다. 같은 기획서라도 각 부서의 입장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라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영업부서의 말은 재무부서한테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긍정적 반응이라는 말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예산을 집행하는 재무팀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제일 큰 소득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피상적인 매출 산출액이 재무팀에서 보다 더 타당한 근거를 안고 다시 설정되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사업과 그래도 할 수 없는 사업이 있다는 거, 그리고 그것의 판단이 모두 등급화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 기획안이 보류되고 거부된다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을 만족시키지 못했는가를 고민할 것 같습니다.
재무부장: 보고서 보다 낫네. 회계 공부는 따로 했나?
안영미: 하고 있습니다.
재무부장: 그래 빨리 배워둬. 회계는 경영의 언어이니까!
후~ 인용이 너무 길었다. 재무부장이 한 말, “회계 공부는 했나?”, “빨리 배워둬, 회계는 경영의 언어니까” 이 대사를 소개하려고 했다. 회계는 경영의 언어!
다른 대사들은 그냥 멋있게 들릴 뿐이었지만 유독 ‘회계는 경영의 언어’라는 말이 와 닿는다. 회계는 숫자로 이뤄져 있다. ‘수(數)’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여 많은 부분에 관여하고 있지만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의 성조기를 수학자가 만들었다거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단지 수학공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비슷한 연배의 페친이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가 꼭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좋아요’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지만, 난 그가 회계를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그 페친이 해당분야의 전문가로서 잘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업, 다시 말해 경영은 또 다른 문제다.
감(感)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자신의 감이 어느 정도인지 다음 질문을 감으로 풀어보기 바란다.
신문지를 한번 접으면 접혀진 종이는 2겹이 되고 다시 접으면 4겹이 되고, 또다시 접으면 접혀진 종이는 8겹이 된다. 이렇게 종이의 매수는 회수(n)에 따라 2¹=2, 2²=4, 2³=8, 2⁴=16 ··· 2ⁿ 이 된다. 여러 번 접을수록 접힌 종이의 매수는 당연히 많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26번을 접었다면 접혀진 종이의 높이는 어느 정도 될까?
참고로 신문지 1장의 두께는 신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3장이 약 1㎜정도이다. 그러니까 13,000장이 1m가 되는 셈이다.
이 질문은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 회계 학원을 하던 친구로부터 받았던 질문이다. 내가 알기로 이와 비슷한 문제가 책으로도 소개된 것도 본 적이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수학 관련 책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생략하고 어떻게 답은 구했는지? 책상높이 정도? 아니면 당신의 키만큼?
단순히 감을 이용한다면 여러 가지 답이 나오겠지만 산수실력을 동원하여 정확히 계산하면 신문지를 26번 접은 종이의 매수는 226 이 된다.
226= 67,108,864장이 되고, 이것을 m로 환산하기 위하여 13,000으로 나누면 약 5,160m가 된다. 어림잡아 63빌딩 높이의 30배가 넘고, 한라산 높이의 2배 이상으로 높다.
이런 류(類)의 문제를 처음 접하는 경우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놀라는 것이 정상이고, 놀라지 않았다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거다. 당시 친구에게 질문을 받고 그나마 수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자부하던 나는 일반 아파트 높이 정도로 이야기했었다. 나(인간)의 감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보여주는 씁쓸한 기억인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공해에 찌들수록 우리들의 감은 더욱 형편없어 질 것이다.
고(故)정주영 회장의 경우 특별히 감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주영 회장이 5공 정부 때 프랑스 르노자동차와 기술제휴 관계로 협의를 하다가 르노 측에서 2백16만대 생산기준으로 대당 2.4%인 62달러의 로열티를 요구하자 엄청난 금액을 요구한다면서 펄쩍 뛴 적이 있었다.
유럽국가와 외교관계를 개선하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 말을 듣고 62달러면 우리 돈으로 4만 여원(당시기준) 밖에 안 되는데, 차 한 대 팔고 4만원 돈이 엄청난 것이냐고 정주영 회장에게 면박을 줬다는 사실이 정세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의 자서전에 실려 있다.
2백16만 대 기준으로 대당 4만 원이면, 864억 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겐 4만 원으로 인식된 2.4%가 정주영 전 회장에겐 864억 원으로 받아들여진 경우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이다.
결국 르노자동차와의 제휴건은 자동차를 한 대 팔 때마다 4만원을 지불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큰’경우라며 현대자동차가 포기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둔감한 수감각도 놀랍거니와 정주영 회장의 뛰어난 수감각도 놀랍기만 하다.
사업을 한다면 감보다 숫자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회계는 꼭 배워둘 일이다. 회계는 경영의 언어이니까. 예비 창업자는 명심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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