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는 혼돈의 한 기형이다”
돌멩이 네 개를 주워 땅에 던지면 돌멩이는 아무렇게 흩어지지만, 우연히 완전한 정사각형을 이룰 수도 있다. 돌멩이들이 그리는 모습은 결국 하나의 혼돈이다. 질서는 혼돈 중의 한 특이한 형태이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참 해괴한 논리지만 묘하게 말이 된다. 이처럼 ‘드래곤 라자’에는 묘하지만 설득력을 가진 문구들이 많고, “인간은 단수가 아니다”처럼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문구들도 많다. 판타지소설에서 이와 같이 멋있는 문장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뿐만 아니라 일반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흥미로운 요소도 있다. 보편적으로 판타지 소설의 배경은 용감한 기사와 아름다운 레이디가 있는 중세유럽이다. ‘드래곤 라자’ 역시 시대적 배경은 중세유럽인데 이슬람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사막의 나라 자이펀은 영락없는 중동지역을 연상시키고 운차이의 행동은 무슬림과 차이가 없다.
판타지세계를 창조한 것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인데,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반지의 제왕’에 비견할 만한 작품이다.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적 환경을 조성한 공로(호빗·오크 등 판타지에 등장하는 종족은 반지의 제왕에 처음 등장하였다)는 인정하지만, ‘드래곤 라자’에서 풍기는 짙은 문학적 향기는 ‘비견’이란 말을 아깝게 한다. 그리고 ‘드래곤 라자’에는 덤으로 해학까지 있다.
[드래곤라자에 나오는 종교인사]
※첫 문장이 건네는 인사이고, 다음 문장은 받는 인사이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순결한 소녀와 엘프의 신 그랑엘베르의 인사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코스모스와 폭풍의 신 에델브로이의 인사
필요한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호빗과 갈림길의 신 테페리의 인사
정의가 닿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피어오르는 장미를.
열정의 꽃잎처럼 불타는 마음을.
-장미와 정의의 신 오렘의 인사
칼날 위에 실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름의 영광에 의지하여.
창조가 닿을 수 없는 미를 찬미하며.
-검과 파괴의 신 레티의 인사
카리스 누멘의 가호가 있기를.
그 모루와 망치의 불꽃의 정수가 그대에게.
-드워프와 불의 신 카리스누멘의 인사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독수리와 영광의 신 야사스의 인사
[드래곤라자의 명대사]
▷축제(수확)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루트에리노
▷웃기는군. 의로운 자들은 감옥에, 악당은 바깥에. 인간의 방식인가? -엑셀헨드(드워프)
▷사람들은 다 모험가야. 산다는 것만큼 큰 모험은 없어. -네리아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하는 자는 얻는 것이 없지. 인생의 묘미 중 상당부분은 반전에서 오니까. -운차이
▷시간아래 영원한 것은 없어요. 어울리기 위해선 달라야 하지요. -이루릴
▷모든 것을 다해보기엔 우리 수명이 너무 짧아. 내 생각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어. 자신이 겪는 일을 최대로 즐기면 돼. -샌슨 퍼시발
[드래곤라자에 나오는 명문장]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엘프의 특징을 제대로 표현한 명문구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웬만한 판타지 소설은 두루 섭렵했다고 자부하는데 이처럼 짧은 글로 엘프의 특징을 표현한 책은 없었다. 따봉!!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이우혁의 ‘퇴마록’, 전민희의 ‘용의신전’ ‘세월의 돌’과 함께 대한민국 판타지 소설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판타지소설의 대표작이라 하더라도 모자람이 없다. 판타지 독자로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용의 신전을 세월의 돌로 정정합니다. 페이스북 MJ Oh 님께서 지적해주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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