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안씨 시조 방걸장군에 대하여

순암 안정복
실학의 대부 순암 안정복.

장인은 갓 결혼한 사위에게 경기도 광주 안씨의 시조는 방걸 장군이라고 했다. 결혼 초 새신랑은 처갓집에만 가면 영문도 모르고 열심히 방걸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신부의 성이 안씨이기 때문이다.

장인은 방걸인지 방글인지 불분명한 발음으로 그 대장군이 얼마나 많은 왜구를 무찔렀으며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사위에게 알려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렇지만 새신랑의 머릿속에 입력된 역사서 어느구석에서도 그 방걸인지 방글인지 하는 장군은 찾을 수 없었다. 장군이라고 했으니 어느 전투에서 분명 꼬리가 드러날 법한데 오리무중으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신라의 화랑 반굴을 잘못 말했나보다 생각을 해봤지만 개운하지가 않다. 알다시피 반굴은 관창과 함께 어린 나이에 황산벌에서 죽었기 때문에 후손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신랑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방걸인지 방글인지 하는 장군을 대단히 용맹한 우리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정리하고 찝찝함을 애써 털어냈다.

그러다 뒤늦게 다시 방걸인지 방글인지 하는 장군에 관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의 딸이 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왔기 때문이다.

『광주 안씨의 시조는 방걸(邦傑)로 고려 태조 때 광주 지방에서 관리로 있다가 광주의 일부 사람들이 지방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당시에 성씨가 없었으나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安)씨 성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터넷 ‘두산백과사전’에 나오는 광주안씨 시조 방걸에 대한 내역이다. “흠, 역시 방걸이었구먼…” 아빠가 어린 딸에게 이 문장을 토대로 설명을 하자, 딸은 “방걸의 아빠는 누구야?”라고 되묻는다. “음.. 그것은 말이지… 어버버…”

다음에 좀 더 조사한 연후에 알려주기로 하고 일단 철수. 그 이후로 열심히 조사를 했고, 경기도 광주 안씨에 대한 단서를 육관 손석우1의 기록2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논란이 되었던 순흥안씨가 광주안씨에서 분간했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논란에 대해서도.

결론부터 말하면 안씨는 원래 안씨(氏)가 아니라 이씨(氏)이다. 그리고 안씨의 가장 윗 조상은 이원(李瑗)으로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 뒤에 이원이 아니라 안원(安瑗)이 되었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는 이씨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이씨가 안씨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중국의 농서 출신의 이씨 성을 가진 이름이 원(瑗)이라는 사람이 사신을 따라 신라로 오게 되었다. 이때가 신라 애장왕 7년(806)때의 일이다. 이원은 신라의 풍물과 인심에 반해 그대로 눌러앉아 살았다. 그는 신라 여인을 아내로 맞아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지춘(枝春), 둘째가 엽춘(葉春), 셋째가 화춘(花春)이었다.

이름에 춘자가 들어가는 3형제를 둔 이원이 나이가 들어 세상을 하직할 때 이상한 유언을 했다. 그는 풍수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마을 뒷산 어디어디에 쓰라고 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머지않아 성씨(姓氏)가 바뀔 것이다. 비록 성씨가 바뀌더라도 좋은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괘념치 말라”

지춘, 엽춘, 화춘 3형제는 아버지 이원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유언대로 아버지가 미리 정해놓은 자리에 묘를 썼다. 이때가 신라 경문왕 4년(864)의 일이었다.

신라 경문왕때는 왜구의 침탈이 극심할 때이다. 왜구들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내륙으로까지 마수를 뻗쳤는데 이들 3형제가 살던 마을도 왜구들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들 3형제가 분연히 일어서 관군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지 말고 스스로 지키자고 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이 소식은 경문왕에게 보고되었고, 왕은 이들 3형제를 불러 벼슬을 내리고 새로운 성씨와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성은 안씨(安氏)이고, 이름은 차례대로 방준(邦俊), 방걸(邦傑), 방협(邦俠)이다.

왕이 이들의 성을 안씨로 한 것은 안국(安國), 즉 나라를 평안케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준은 죽산군 (竹山君)으로, 방걸은 광주군(廣州君)으로, 방협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해졌으니, 죽산군 방준은 죽산 안씨의 시조가 되고, 광주군 방걸은 광주 안씨의 시조가, 순흥 안씨는 막내 죽성군 방협의 후손에서 파가 갈라져 나왔다.

왕은 3형제의 아버지 이원도 뒤에 안원으로 성씨를 바꾸어 주었으니 오늘날 죽산안씨, 광주안씨, 순흥안씨는 모두 안원의 후손이 된다.

위 두산백과사전에는 고려 태조 이후 방걸이 안씨 성을 갖는 것을 나오지만, 이번에 알아본 바로는 모든 안씨들의 가장 윗 조상 안원은 신라 애장왕 7년에 중국에서 건너온 원래 성이 이씨인 이원이며, 이들이 안씨가 된 것은 신라 경문왕 때이다.

이렇게 안씨 문제, 즉 방걸에 관한 의문을 해결한 예전의 새신랑은 조만간 장인을 만나 방걸 대장군의 원래 이름이 엽춘이며, 엽춘의 원래 성은 이씨이고, 중국에서 왔노라 큰소리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장인의 표정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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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관 손석우: 육관도사로 불리는 풍수의 대가로 뿌리찾기 연합회 회장 및 전국 종친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2. 해당기록은 도서출판 ‘답게’에서 펴낸 「터」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육관도사가 구술하고 출판사에서 구술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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