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홍범도 유해봉환 행사를 본 소회

홍범도
1921년 당시 홍범도 (이미지출처:위키백과)

나, 홍범도, 고국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홍범도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면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비문에 새기겠다며 이동순 시인에게 요청하여 받았던 초안이다.

고백컨데, 나는 홍범도에 대해 호감이 없어-그래서 장군님 호칭도 생략한 것이고- 이번 유해봉환 행사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울러 홍범도를 장군님이라 칭하며 흠모하고 기리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도 없다. 세모가 좋을 수도 있고 네모가 좋을 수도 있으니까.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의 공과를 모두 살펴야 한다. 그런데 홍범도의 경우 그 공과의 경중을 제대로 판단한 것일까?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대장이다.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와 함께 우리 독립군이 거둔 엄청난 업적이라고 배웠던 바로 그 전투이다. 그렇게 배웠으므로 그렇게 알고 있다. 실상도 그럴까?

봉오동 전투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지만, 우리가 알아온 것처럼 엄청난 승리를 거둔 전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금의 노력만 기울이면 알 수 있다. [참고]

그렇더라도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의 신식 군대와 전투를 벌였던 것은 사실이고, 그 독립군을 이끌었던 대장이 홍범도였으므로 그의 치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봉오동 전투 이후 홍범도의 행적은 독립군 대장을 상상하는 우리의 생각과 반대라는 점에 있다.

러시아 땅에 아무르주가 있고 그곳에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라는 도시가 있다. ‘자유로운’이라는 뜻의 스보보드니를 우리는 자유시라고 불렀는데 그곳에서 청산리, 봉오동 전투 등을 치러왔던 우리의 무장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 볼셰비키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자유시 참변 혹은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흑하는 아무르강을 뜻하는 말이다. 이 자유시 참변은 홍범도가 독립군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주홍글씨처럼 그의 공적을 퇴색시키고 있다. [참고]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이듬해 레닌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금화 100루불,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쓰여진 모젤 권총을 선물 받기도 했다.

그로 인해 같은 독립군 동지였던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동지들을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정식 공산당원(당증번호 578492)이었으므로 석방된다.

봉오동 전투가 홍범도의 공이라면 자유시 참변은 그의 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과가 뚜렷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역사에서 공과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닌데 유독 일본에 관한 것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평가절하하면서 언젠가부터 공산주의와 연결된 것에는 관대한 이상한 평가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친일파로 낙인찍혀 공이 있어도 무시당하고 매도당하는 인물이야 워낙 많으니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공산주의자라면 홍범도와 더불어 영화 암살로 미화된 김원봉 같은 경우는 그 좋은 예가 된다.

독립군으로서 공은 있으나 공산주의자로서의 김원봉의 행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쨌거나 김원봉은 6.25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 수뇌부의 일원이 아닌가.

홍범도 유해봉환 행사를 보며 이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다 간 인물처럼 착각하기 딱 좋겠기에 하는 말이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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