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에 가면 커다란 와불과 함께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라는 절이 있다. 안치환의 노래 ‘풍경 달다’에 나오는 곳이라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종교를 떠나 한 번쯤 가보고픈 마음을 생기게 하는 절이다.
정호승의 <연인>은 바로 운주사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¹ ‘푸른 툭 눈’에 관한 이야기다. 풍경을 의인화하여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렸다.
책장을 펼치면 금세 푸른툭눈에게 감정이입이 되는데 온몸으로 부딪치고 체험하는 그의 여정이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마치 지난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지루한 삶, 오랜 연인에 대한 권태, 분명 어딘가에 있을 진정한 사랑에 대한 환상 등등.
처마 끝에 고정된 한정된 삶에서 벗어나 전설 속 비어(飛魚)²가 되어 마음껏 하늘을 날고픈 ‘푸른툭눈’은 어느 날 기적처럼 소원을 이룬다. 위험에 처한 새끼 제비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날린 덕분이다. ‘마음으로 진정 원하면 이루게 되리라’라는 와불님의 말씀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게 비어가 된 푸른툭눈은 꿈에 그리던 바다에도 가보고 기차도 타보고 넓은 세상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때론 행복하고 때론 무섭고 때론 한없는 외로움을 맛본다.
긴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들. 만나서 사랑하고 웃고 행복해하고 그러다 싫증 내고 다투고 헤어지고, 아름답고 가슴 아픈 죽음도 목격한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쳐가는 푸른툭눈은 운주사에 있는 또 하나의 풍경 ‘검은툭눈’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풍경 소리가 그리워 조계사에 갔다가 만난 화가에게서 검은툭눈이 아직 자기를 사랑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침내 운주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푸른툭눈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또 하나의 풍경 오랜 연인 ‘검은툭눈’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다.
다시 만난 두 개의 풍경이 나누는 진실한 사랑의 언어는 단순한 공감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쉬운 말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푸른툭눈, 난 네가 고마워. 나 자신을 알게 해 줘서 말이야. 난 너를 통해서 비로소 나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어. 나에게 돌아온 네 마음속에 나의 참모습이 있어.”
“그건 나도 그래.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어. 나를 기다려준 너의 마음속에 내가 있어.”
“지금까지 난 나의 겉모습만 가지고 널 사랑한 거야. 이제 너의 마음속에 투영된 나의 속 모습으로 널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참 기뻐”
“검은툭눈아, 정말 고마워. 혹 내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날 사랑하는 너에 의해서 형성된 거야.”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내 모습이 보인다고 했던가? 상대가 짜증을 내는 것은 내가 짜증을 내고 있음이고, 상대가 웃고 있음은 내가 웃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나를 볼 줄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고 싶다.
푸른툭눈이 외롭고 힘들 때마다 별빛으로 나타나 위로해주는 운주사 와불님은 그의 곁에서 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전지전능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위로를 주고 보듬어 주면서 선택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존재, 와불을 통해 작가가 그려낸 신의 모습은 바로 내가 원하는 신의 모습과 같다.
“울지 마라. 분노 때문에 너 자신을 다치게 하지 마라.”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살면서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고통이란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이다.”
“너라고 해서 고통이 없으란 법은 없다. 나에게도 고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상처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진주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이다.”
“넌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어라. 잃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아라.”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부제가 붙은 <연인>은 현학적으로 쓰인 두껍고 난해한 책보다는 쉽고 단순한 동화 속에 오히려 심오한 삶의 철학이 담겼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책이다.
절에 가서 빛바랜 단청을 바라보거나 가만히 풍경 소리를 듣고 있자면 와불님이 푸른툭눈에게 들려주던 말들이 마음으로부터 들려온다.
신에게 무언가를 소원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에 이따금 절을 찾게 된다. 복잡한 심경을 진정시키기에 그만한 처방도 없는 것 같아서.
입춘이 지나니 여기저기서 봄기운이 느껴진다. 집 근처 탄천에는 버들강아지와 함께 개나리가 노란 얼굴을 살짝 내밀었고 앞산 양지바른 비탈에는 진달래도 수줍게 분홍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마쳤다.
누구의 희망처럼 새순이 돋는 계절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엔 향긋한 봄 내음이 실려야 하는데 꽃바람에 앞서 요란한 선거 바람이 먼저 분다.
너도나도 제가 잘났다는데 그들에게 와불님과 같은 자애로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푸른툭눈이 깨달은 자신의 본질-풍경은 물고기이지 새가 아니다- 정도는 아는 사람이 바람을 타기를 바란다.
빨강인지 노랑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봄꽃이 만발하면 운주사 와불님을 뵈러 가야겠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를 겸 푸룬툭눈과 검은툭눈이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맑은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다.
새로운 인연을 꿈꾸는 분이나 혹은 오랜 연인이 조금씩 권태로워지기 시작한 분이라면 잠시 짬을 내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저자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노래 ‘풍경 달다’와 함께.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정호승 ‘풍경 달다’
1. 풍경(風磬):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2. 비어(飛魚): 날으는 물고기. 원래는 날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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