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여인의 몸으로 커다란 바위를 깨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얌전한 고양이 목에 방울 하나 달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식인 상어보다 사나운 거대 괴물에 맞서 발가벗긴 채 짓이겨진 몸뚱이를 가누기가 얼마나 버겁고 외로웠을까. 오직 진실만을 무기로 괴물에 담대하게 맞선 최영미 시인의 외로운 싸움에 우선 경의를 표한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은 최영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서른에 서둘러 끝낸 잔칫상을 힘겹게 다시 차려낸 그녀의 지친 손마디를 한 번쯤 잡아주고픈 심정으로 이 책을 골랐다. 고작 만원으로 그게 가능할까만 티끌 모아 태산이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임은 어쨌거나 자명한 사실이니까.
비껴가지 않는 돌직구. 그녀의 시들은 여전히 너무 적나라하다. 그녀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벗은 몸뚱이를 샅샅이 훑는 것을 초연하게 감내하는, 마치 순교자처럼 보인다. ‘누구든 내게 돌을 던지려면 던져라’라고 부르짖는 것 같은 그녀의 시들은, 적당한 위선 속에 사람 좋은 얼굴로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가감 없이 비웃는다.
4부로 나누어진 이번 시집에는 모두 마흔여덟 편의 시가 수록됐다. 작년 한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시 <괴물>을 비롯하여 상당수 그와 관련 있을 법한 시들이 눈에 띈다.
내게 칼을 겨눈 그들은,
내 영혼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어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리멸렬한 고통이 제일 참기 힘들지
-지리멸렬한 고통-
그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외쳐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짓밟는다면
그의 자유는 공허한 말잔치
그가 아무리 인류를 노래해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비하한다면
그의 휴머니즘은 가짜다
휴머니즘을 포장해 팔아먹는 문학은 이제 그만!
-거룩한 문학-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무슨 상 후보로도 오르지 않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
-바위로 계란 깨기-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뭘 해도
준비서면과 진술서가 머리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지
-뭘 해도 그 생각-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가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래야, 이 삐뚤어진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머뭇거리던 목소리들이 밖으로 나와
하나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로 이어지고
함성이 되어 벽을 무너뜨린다
두려움을 넘어
내가 우리가 되는 기적
보석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은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거라
-여성의 이름으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노트북이 고장나지 않기를.
내 노트북만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한 해 더 살아주마. 2019년아-
-2019년 새해 소망-
이 외 등단 직후인 93년에 민족문화작가회의 회보에 기고한 <등단소감>도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문학이라는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단박에 알아버린 그 동네의 생리를, 아마도 그때 느낀 소감이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시 근간을 이루는 변함없는 뼈대가 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 글에서 ‘개’는 문학한다는 대개의 남자들일 것이며 여류시인은 거드름 피우는 남자들의 비위나 맞춰야 하는 고급 거시기로 비유되어 있다. 고급 거시기는 아마도 ‘창부’를 일컫는 말이겠지. 여성 상위시대 라지만 그건 그저 말뿐 진정한 남녀평등은 요원하기만 한 답답한 현실을 냉철하게 고발한 등단소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날 이후 쭈욱 그녀는 시를 통해 여성운동가 보다 더 여성운동가답게 홀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는 엄마를 간병하며 마주치는 남루한 노년의 일상이나, ‘예쁜 똥을 싼’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딸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시도 있고, ‘겨울이 끝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봄이 오기도 전에 두터운 외투를 치워버린 찬바람 속에 숨겨놓은 3월이 제일 춥다’거나 ‘내가 잘하는 일은 너를 보내는 것, 너희들을 떠나는 것, 창가에 서서 허망함을 태우는 것’이라는 자조, 시골에서 목격한 어느 죽음을 보고 ‘이 세상에 나올 때, 그리고 들어갈 때만 화려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그 밖의 여러 시들도 대부분 온기 없이 외로운, 그러나 다시 오지 않는 그녀만의 시간들이다.
1994년, 그녀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 가식과 위선 없는 민낯의 시어들은, 내가 쓴 것도 아니건만 읽기에 괜스레 민망했었다. 동세대 여류시인의 과감하고도 적나라한 현실 비판은 별다른 이유 없이 시집 읽기에 인색했던 나로 하여금 그것을 사서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었다. 분명 그때 내 돈을 주고 샀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걸 보면 유명세 탓에 누군가 슬쩍 내 책꽂이에서 뽑아간 모양이다. 무려 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으니까.
최영미 시인은 1961년생이다. 곧 해가 바뀌면 육십, 서른에 서른을 더한 나이다. 서울대 80학번,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면 누군들 데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학생조차도 돌멩이 몇 개쯤 수시로 던져봤고 학기마다 지겹도록 최루탄 가스에 노출됐었거늘. 그래서? 그로 인해 지금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그때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지?
8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서 운동 꽤나 했다던 386세대들은 현재 청와대며 국회, 법원, 검찰청, 기업, 학교······. 어디랄 것도 없이 가장 높은 자리를 꿰차고 깊숙한 의자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앉아 있다. 그때 그들이 갈증과 허기로 울부짖던 노래만큼이나 터지도록 꾸역꾸역 제 배만 채우면서 말이다.
제아무리 떠들어도, 제아무리 노래해도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 또한 변하지 않는다지만 그때 그 운동권 학생들은 몽땅 다 싹 변해버린 것 같다. 그때 외쳤던 구호들, 그들이 원하던 세상은 그저 얍삽하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세상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을 그렇게 똑같은 전철을 밟도록 유도한다. 대중을 위한 세상이 언제 있기는 있었나?
정권이 바뀌면 어쩌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나의 어리석음이야 자책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나의 조국에는 과연 어떤 미래가 있을까.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없어져 버릴 나라 중 가장 앞쪽에서 일본과 선두를 다투는 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 자살률은 세계 최고, 요양병원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산부인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이 없는 나라, 노인들만 사는 나라…… 어떻게 무엇으로 지탱해 갈 것인가.
80년대 용감했던 투사들이 이 나라의 중심이 되면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행복한 지상낙원이 될 줄 알았는데 최영미 시인의 노래처럼 그들은 운동이 아닌 운동가만 좋아했음이 틀림없나 보다. 그때의 운동가들은 분명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던 것 같은데, 막상 그들의 세상이 오니 앞선 누구보다 더욱 치졸하게 오직 ‘나와 우리 가족’ 만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어 하니 말이다.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을 ‘더불어’가 아닌, 혼자만의 세상 속으로 소리 없이 밀어 넣으면서.
그렇게 서른 잔치를 끝낸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 밖이었는데 재작년 <괴물>이란 시를 통해 거장 고은 시인을 고발,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주인공이 되어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추접한 늙은이의 항소심에서도 최근 승소했다는 소식을 매스컴이 알려줬다. 재판이 그녀의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희망해보지만 그녀에게 현실은 여전히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은 본인이 스스로 만든 작은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기존 출판사에서 그녀의 작품 출판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게 오늘도 여전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그래 싸워라 맞서라, 본인은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앞으로도 썩은 내 풍기는 이 사회 구석구석을 적나라하게 헤집어 여기저기 널린 더러운 오물들을 고은 영감 집어내듯 집어내 버려라. 아직도 어딘가에서 ‘그년’ 때문에 아까운 노벨문학상을 놓쳤다며 애석해 짖는 희미한 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 시집의 마지막 작품에서 ‘햇살’이라는 시어를 통해 최영미 시인이 인간이면 누구나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희망 한 가닥을 부여잡은듯하여 다행스럽다.
봄은 멀었지만
매화 정원을 찾아가는
낭만 가객
그날의 노트에 적힌
고리키, 로라, 세검정, 어울리지 않는
외래어로 만든 조합 같은 인생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
-1월의 공원-
모두에게 똑같은 햇살이 내리쬐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좋다. 내 아이의 아이쯤이 살아갈 세상은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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