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申聞鼓)는 조선 태종이 대궐밖에 설치한 북의 이름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신문고를 두드리면 임금이 직접 그 사연을 듣고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취지에서 설치한 것이다.
신문고는 태종 2년에 설치되어 유지되다가 연산군 때 폐지되었고, 영조 47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신문고가 이렇게 [설치→ 폐지→ 재설치]의 과정을 겪었던 이유는 모두가 짐작하겠지만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로 시도 때도 없이 북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현재 청와대에서도 조선시대의 신문고와 비슷한 것을 운영하고 있으니 바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라는 슬로건으로 보아 그 취지가 조선시대 신문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그 이용이 매우 쉽다. 개방된 인터넷 게시판에 청원 글을 작성해서 올리기만 하면 되니 비록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금제가 있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 할 곳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아무말대잔치에나 어울릴만한 내용의 청원 소식을 들을 때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일일이 거론할 가치도 없는 스팸이야 어디에나 있으니 그냥 무시하고 삭제하면 그만이지만 흡사 왕에게 상소하듯 작성한 청원을 보면 실소를 넘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특히 “ㅇㅇㅇ 축구 국제심판 심판 (자격을) 박탈하라”거나 “ㅇㅇㅇ 판사를 파면하라”와 같은 사안은 애당초 청와대 권한 밖의 일임에도 이들 청원은 각각 39,776명과 23만 명으로부터 동의를 얻었다.
나는 그런 청원을 올리거나 동의를 한 사람들이 그리 무지몽매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가슴에 쌓인 울분을 토로하는 장(場)이 마땅치 않으니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에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쌓인 감정을 푸는 배설구인 것이다.
조선의 신문고는 초기엔 잘 운영되는가 싶었으나 나중엔 사소한 일까지 신문고를 사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을 초래하였고, 그 때문에 ①자신에 관한 일, ②부자(父子)에 관한 일, ③적첩(嫡妾)에 관한 일, ④양천(良賤)에 관한 일, ⑤자손이 조상을 위한 일, ⑥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⑦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⑧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⑨기타 지극히 원통한 일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답답함이야 이해하려고만 들면 백번 이해할 수 있겠지만 모처럼 좋은 뜻으로 시작한 청와대와 국민 간 소통창구가 얼토당토않은 사안들로 얼룩진다면 원래의 취지는 퇴색되고 그 기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이참에 없애자는 쪽이면 모르겠으나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점을 잘 헤아려 개인적인 감정은 각자 알아서 풀도록 하고 국민청원 게시판은 제 기능을 다 하도록 얼룩을 묻히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청와대나 언론 관계자들은 여론이라는 명목 하에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취사선택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도 자제할 일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사용(私用)하지 말고 이용(利用)하자.
━덧붙임
1. 메리 추석!
모든 사정을 떠나 마음만은 넉넉한 추석이 되길… ^^;
2. 사견을 보태자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행정적인 사안에 대해서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돈 없고, 무지하고, 먹고 사느라 시간 없어 행정소송 못하는 국민이 허다해서 하는 말이다. 이왕 도와 주려면 실질적인 도움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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