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판이가 죽었다. 친구 만판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 친구들 사이에 퍼졌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차츰 그가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친구들은 급히 장례식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역할을 분담하는 등 분주하게 장례식 준비를 해야 했다.
만판이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다. 만판이는 엄청난 부잣집의 외동아들이다. 만판이가 거동하는 날은 우리들 모두 목구멍에 기름칠 하는 날이다. 그때는 멀게 느꼈지만 사실 그리 먼 곳에 살지 않는 만판이가 친구들을 만나러 오면, 친한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들까지 몰려와서 괜히 친한 척 한다.
일반 커피가 오백 원, 냉커피가 천 원 할 때였는데 만판이는 한번 올 때마다 어떤 때는 오백만 원, 사정이 좀 안 좋으면 삼백만원 정도를 가져와서 이삼일 만에 다 쓰고 간다. 그러니 친구들은 “만판이 언제 온다고 하대?”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던 만판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그의 부모가 참석하지 않는 장례식을 무사히 치러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일이다.
남들이 믿거나 말거나 나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 귀신이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귀신을 자세히 그것도 자주 본다. 기(氣)가 허(虛)하면 귀신이 보인다던데 보약이라도 한 재 달여 먹어야 할까보다.
귀신 자주 본다는 소리를 어디 가서 하면 미친놈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고, 여차하면 정신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르기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살았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접속했다가 엑소시즘에 관한 동영상을 공유해놓고 귀신이야기로 댓글놀이를 하던 한 페친에게 “난 귀신 본적이 있는데…”라고 했더니, 그 페친이 “나 귀신이야기 엄청 좋아하는데 귀신이야기 좀 해주쇼~”라고 했다. 나는 의례적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지나 또 귀신이야기가 나온 상황에서, 내가 무슨 부탁하는 말을 했더니(무슨 내용인지는 까묵), 그 페친이 “귀신 이야기 해주면”이라고 해서, 전에 귀신이야기 해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
“귀신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약조를 했으니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시일이 지나 귀신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귀신이야기를 하기가 그만큼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정신병원 갈지도 모르니까.
거짓말로 치부해도 좋으니 그저 재미로만 들어 줬으면 좋겠다. 괜히 어디 가서 “덕구 맛이 갔더라”하면 안 된다.
아버님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올 여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이 있던 기간 내내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의 장례식장은 참 글타.
내가 상주라 거의 빈소만 지키다가 간혹 접객실에 나가곤 했는데, 밤이 늦어 찾아올 사람이 없겠다 싶은 시각에 잠시 쉬려고 접객실로 나왔다. 접객실에 있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는데 멀리 한쪽 끝에 누군가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명 낯은 익은데 분향할 때는 본 기억이 없었다.
“누구지?” 하며 내가 그쪽으로 가려는 순간 뭔가 쏴~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만판이었다. 만판이가 또 찾아 왔다. 만판이는 나를 보더니 한쪽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고맙다, 만판아~
그렇게 하루가 갔다. 그날 다른 친구들에겐 만판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분은 내가 아직 덕구로 보이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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