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역사란 이미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니 어떤 역사적 사실에 ‘만약’이라는 전제를 붙이고 다른 이야기를 해본들 있었던 사실이 아니므로 그것을 역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만약이라는 마법의 조미료를 첨가하면 새롭고 멋진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 속에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면 판타지소설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한편의 역사소설이 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이우혁의 ‘왜란 종결자’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왜란 종결자’는 은동, 호유화, 태을사자, 흑호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이고, ‘원균 그리고 원균’은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감춘 것으로 설정한 역사소설이다.
또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침으로 중풍환자를 고치는 침술의 대가로 나오지만 사실 허준은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이었다.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이나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전형적인 역사소설로써 작가가 ‘만약’이라는 조미료를 첨가한 것이라 하겠다.
하명무의 ‘신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세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역사소설이다. 그동안 제법 많은 역사소설을 읽었지만 이 소설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은 드물었다.
“아는가, 광개토 태왕. 삼국사기엔 그가 서른아홉에 죽었다고 했고, 비문에는 서른아홉에 ‘기국(棄國), 즉 나라를 버렸다’고 나와 있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70세, 큰아버지 소수림왕은 65세, 아버지 고국양왕은 70세, 아들인 장수왕은 98세까지 장수했고, 그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전 2년간은 이렇다 할 전쟁도 없었다. 그 불세출의 정복군주가 서른아홉에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발문(跋文) 중에서-
신비는 중국여행길에 우연히 발견한 고구려시대의 고문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와서 번역한 내용이라며 도입부에서부터 강력한 개연성을 제시한다. 만약 초등학생이 신비를 읽었다면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두절이라는 백잔(백제)출신인 광개토대왕 호위무사의 시각으로 기록된 신비에는 고구려왕들의 절대권위와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되어있다. 광개토대왕이 제갈공명 이상의 병법가로 묘사된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날이 우라지게 더운고로 더 이상 썰을 푸는 것이 힘들지만, 신비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남녀 간의 로맨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사나이들의 의리를 중요시 하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괜찮은 역사소설을 찾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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