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압~싸~알~떠어~~~억~~”
제가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가밀집지역이 있는데 밤이면 찹쌀떡장수의 구성진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사계절중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지요. 일본순사복과 흡사한 옛날교복을 입고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리드미컬하게 뽑아내는 찹쌀떡 장수의 “찹쌀떡~” 소리는 겨울밤이 깊어가는 소립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진 바람에 생겨난 사계절! 지구의 북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밤은 깁니다. 춥고 긴만큼 겨울과 겨울밤에 얽힌 사연들은 누구나 많을 테지요.
누군가와 찹쌀떡을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딱 좋을 겨울밤. 유독 길게 느껴지는 이놈의 겨울밤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처음 읽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에너지가 귀해 무엇이든 아껴야했던 시절, 어렸을 때 저희 집에선 저녁식사를 마치고 두어 시간만 지나면 강제 소등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 불을 켜뒀다가 걸리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거든요.
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교에서 빌려온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마저 읽고 반납해야 하는데 소등 때문에 읽지 못할까 걱정이 되더군요. 그러다 아주 단순하게 해결을 했습니다. 이불속에서 양초를 켜고 몰래 책을 읽는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지요.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머리로 이불을 받쳐 들고 불빛이 새어나갈세라 구멍들을 틀어막고 열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이불을 살짝 들었다 놨다 하면서 책을 읽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요. 그런데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집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에 난리가 났지요.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고 이불과 벽을 약간 태운 채 진화되었는데, 그날 밤 나는 정말 뒈지게 맞았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책을 읽다가 불을 냈는데, ‘수호지’를 읽을 때, 동네 누나에게서 ‘왕비열전’을 빌려와서 읽을 때도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불을 내면 불을 켜는 것을 허락해줄 법도 한데 끝내 강제소등 방침은 철회되지 않더군요.
지금은 소등 걱정 없이 책을 읽습니다만 아무래도 책 읽는 맛은 그때보다 못합니다. 맛만 못한 것이 아니라 머리에 쌓이는 지식의 양도 못한 것 같더군요.
초등학교 3~4학년 때 지구를 한 바퀴 돌 때 동쪽으로 도는 것과 서쪽으로 도는 것에는 차이가 난다는 사실과 경도를 1도씩 지날 때마다 4분씩 빨라지거나 늦어 질 수도 있다는 이치를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며 깨우쳤으니까요.
동네친구들과 어깨를 맞대고 유행가를 목청껏 부르며 온 동네를 이유도 없이 쏘다니던 일이나 군에서 동계훈련의 일환으로 한겨울에 눈 쌓인 길을 밤새도록 걷던 일 등 겨울밤에 얽힌 기억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몰래 책을 읽었던 어린 시절 겨울밤이 가장 기억납니다.
금지된 장난처럼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는 재미가 참 좋더군요. 가능하다면 한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젠 불을 내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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