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와, 승민이 어머니. 누구신가 했어요. 이렇게 예쁘게 하고 어디 가세요?”
“엄마들하고 그림책모임 하러 가요. 막내가 이번에 어린이집 들어갔거든요. 아이들 오기 전에 그림책 공부 좀 하려고요.”
승민이 엄마는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들만 셋을 키우는 엄마다.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아들과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아들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막내아들까지 아들 셋을 키우는데 젊은 엄마가 참 생각이 바르고 야무지다.
아침마다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쳤던 승민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배꼽에 대고 90도로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승민이가 기특해서 몇 권의 그림책을 선물로 주었었다. 그게 3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승민이 엄마는 막내아들까지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이들이 없는 오전 시간에 배우고 싶은 그림책 공부를 한단다.
엄마들 몇몇이 모여 그림책을 읽고 느낌을 나눈다고 했다.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고 함께 사는 공동체의식을 잃지 않는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가족 품앗이 ‘글고운’ 모임의 다섯 명의 어머니들. 한 달에 한 번 계양구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모여 그림책 공부를 한다는 엄마들이 궁금했다.
마침 엄마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기에 정기모임이 있는 날 참석하기로 했다. 계양구 노인복지관내 건강가정지원센터. 그림책을 사랑하는 엄마들 다섯 명이 설렘 가득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위에는 작고 앙증맞은 꽃다발이 나를 반겼다. 나에게 주려고 준비했단다.
책상 위에는 바나나와 사탕, 솜씨 좋은 엄마가 직접 구운듯한 예쁜 쿠키, 시중에서 파는 김밥보다 더 야무지게 말아놓은 꼬마김밥, 그 옆에는 꼬마김밥 먹을 때 사용하는 용도로 보이는 일회용 비닐장갑 한 짝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작지만 따뜻한 배려가 있는 ‘글고운’ 엄마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전해졌다.
“선생님 오신다고 해서 저희들이 간식을 조금 준비했어요. 저희들이 이곳에 모여서 그림책 공부를 한지 오늘이 1주년 되는 날이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축하드려요. 그런데 다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들 모여서 그림책 공부를 하시게 되셨어요, 아이들이 모두 같은 학교에 다니나요?”
“아뇨. 저 언니는 영종도에서 왔고, 저는 남동구에서 왔어요. 다섯 명 모두 사는 곳이 다 달라요.”
“그런데 어떻게···?”
정말 궁금했다. 사는 곳이 제각각 다른 엄마들이 왜 이곳에 모여 그림책공부를 할까, 그런 내 표정이 읽혔나보다.
“아~ 저희들이 1년 전에 여기서 그림책 강의를 들었어요. 강사선생님이 후속모임을 꾸려서 계속 그림책 공부를 하면 좋을 거 같다고 하셔서 저희들이 모임을 만들어서 그림책도 같이 읽고 느낌도 나누고 해요. 그냥 엄마들의 수다로 끝나는 자리가 될까봐 일지도 꼬박꼬박 쓰고요.”
한 달에 한번 씩 이곳 계양구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모여 그림책 공부를 한다는 엄마들. 그림책을 좋아하는 엄마들이라 그런지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웠다.
‘글고운’ 엄마들은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그림책공부를 할 때 돌아가며 리더를 한 명 정해서 그날 모임을 이끈다고 했다. 오늘 모임은 승민이 엄마가 리더였다. 엄마들이 미리 내 그림책들을 읽고 나를 기다렸나보다. 돌아가면서 그림책을 읽은 소감을 나누는데 허술하지 않고 체계적이었다. 책을 읽은 느낌을 나누는 엄마들 모습이 참으로 진지했다.
“선생님 책중에 저는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좋았어요. 선생님이 그림책을 읽어주니까 듣고 있는데 제가 참 좋더라고요. 저는 그림책은 아이들에게만 읽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한테 읽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들만 셋인데 《책읽어주는 할머니》 주인공 민정이처럼 아이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드리라고 시켜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희 엄마도 이 책 주인공 할머니처럼 글자를 모르시거든요. 그래도 엄마욕심에 글자공부를 하셔서 짧은 글자는 읽으시는데 받침 있는 글자는 못 읽으세요.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주면 우리 엄마도 심계옥 할머니처럼 글자를 알게 되지 않으실까요?” 승민이 엄마가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엄마한테 이 책을 사드려야겠어요.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시디를 엄마가 매일 들으시게요. 책을 읽으면 이렇게 편하구나, 좋구나 하는 느낌을 엄마가 느껴보시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엄마가 글자를 꼭 완벽하게 깨우쳐야 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편하게 책을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글자를 모르는 엄마에게 아이들을 시켜 책을 읽어드리게 해야겠다는 승민이 엄마 말을 들으니 참 고마웠다.
“저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는데 시디로 된 이야기는 잘 안 들려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쓰신 책 《비밀상자》에 들어있는 시디는 우리 아이들이 좋아해서 틀어줬어요. 선생님이 읽으시는 톤이 재밌나 봐요. 선생님이 ‘할머니 어야~ 간다’ 이렇게 읽으신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어야’라는 말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읽으신 그 톤이 너무 좋은가 봐요. 맨날 이 말을 따라하는 거예요. 제 아이가 7살 인데 자기가 아침에 안 일어나면 저한테 이 말을 해달라는 거예요. ‘할머니 어야간다’하고요.
그리고 제 둘째 아이가 네 살인데 선생님 책 《비밀상자》 중에 나오는 말 ‘해가 똥구녘에 걸렸다.’ 이 말을 일주일째 계속 하는 거예요. 유치원에 가서도 ‘해가 똥구녁에 걸렸다’ ‘해가 똥구녁에 걸렸다’ 하고요.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시키지 않아도 계속해서 읽는 거 같아요. 어제 시어머니 모시고 아이들이랑 밥을 먹었어요. 그런데 우리 큰 아이가 선생님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처음부터 중간까지 다 외워가지고 시어머니에게 그대로 얘길 해주는 거예요. ‘해가 똥구녘에 걸렸다’, ‘이 할미 어야 간다.’ 하면서요.
두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할머니한테 책이야기를 하니까 시어머니도 좋으셨나 봐요. 사실 저도 시어머니에게 책을 읽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죠. 어머니 혼자 계시니까요. 그런데 아이가 저보다 낫더라고요. 책을 가져간 것도 아닌데 외워서 할머니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걸 보고 기특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아이들에게 억지로 책 읽어라 책 읽어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구요. 그저 좋은 책을 골라 재밌게 읽어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꼬마 김밥을 맛있게 만들어온 정우엄마 수미씨가 웃으며 말했다.
“수미씨 아이들은 어떤 책을 좋아하나요?” 내가 물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림책을 볼 때 우선 웃기고 재미난 거에 관심을 가지는 거 같아요. 그 다음 잔잔한 내용은 자기 스스로 느끼고요. 아무리 교훈적인 책도 재미가 없으면 아이들은 안보는 거 같아요.”
그림책모임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거 같다는 정우엄마 수미씨는 ‘글고운’ 모임에서 일지를 맡아 쓰고 있었다. 글 쓰는 게 재미있다는 수미씨, 무슨 일이든 재밌게 즐겁게 하면 신바람이 나는 것 같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 정우엄마 수미씨가 쓴 글고운 모임의 일지를 보니 글도 참 잘 쓰셨다.
“선생님 책을 보면 선생님은 꽤 오랫동안 온 세상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해요.” 혜솔이 엄마 금주씨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건 제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예요.”
“좋은 어른이요?”
“예, 좋은 어른이요.”
“좋은 어른이란 어떤 어른인가요?” 금주씨가 또 묻는다. 역시 공부모임이라 약간의 의문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자기가 배우고 익힌 재주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모두가 다함께 행복하고 즐겁게 살도록 도움을 주는 어른이에요. 내 아이만 잘 키워서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세상이 결코 좋은 사회,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어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내 아이만 잘 키울게 아니라 더불어 다른 아이들도 잘 키워야 해요. 그래야 내 아이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끼리 으샤으샤~~ 의로운 기를 모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나누다 보면 이 세상은 그만큼 더 행복해질 거예요. 배우고 익혀서 많이 나누셔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무엇을 나눠야할까요.” 승민이 엄마가 물었다.
“‘나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어렵지 않아요. 조금만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면 나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책을 읽어주는 것도 일종의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어요. 내 아이한테 책을 읽어주는 것도 나누는 거고,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도 나누는 거고, 직접 내가 책을 읽는 것도 나한테 나누는 거예요. 자기 자신한테 언제 그림책을 읽어줘 보겠어요. 이걸 객관화시키면 이것도 나눔이죠.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듣는 사람도 읽어주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즐거운 나눔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도움을 베풀 수 있기에 누구나 다 위대해질 수 있다. ‘책읽어주기’ 이것이야말로 혼잡한 이 세상에서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뜻있는 엄마들의 그림책모임 글고운. 나는 오늘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예쁜 엄마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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