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게 하소서, 내 슬픈 운명을.
나 한숨을 짓네, 나 자유 위해.
고통의 끈을 끊어주소서.
나의 이 큰 고통의 끈을 끊어주소서.
울게 하소서, 내 슬픈 운명을.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중 소프라노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sci Ch’io Pianga)이다. 영상은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의 사연을 그린 동명의 영화 ‘파리넬리(Farinelli)’의 한 장면인데 파리넬리 역을 맡은 ‘스테파노 디오니시’가 ‘울게 하소서’를 노래하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파리넬리의 본명은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로 12세 때 아버지에 의해 거세당한 것으로 알려진 카스트라토(castrato)이다. 변성기가 되기 전의 소년을 거세하여 고음의 여성 음역을 낼 수 있도록 훈련된 가수를 카스트라토라고 하는데 중세 유럽에선 일상화된 문화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한(恨)이 맺힌 소리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소리꾼 송화의 일대기를 담은 ‘서편제’가 있지만, 송화가 가공의 인물인데 반해 파리넬리는 18세기 이탈리아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송화나 파리넬리가 자의로 눈을 포기하고 거세를 하였겠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인간들의 끊임없는 욕망은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어젯밤 잠들기 전 무단히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데,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꼽아보았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얻은 것은 별로 없는데 잃은 것만 많아서 놀랐던 것은 아니고, 잃어버린 것 중에 ‘눈물’이 낑겨(?)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울었을 때가 대학1학년 때 형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던 것 같다. 작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척 슬펐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언제부터 눈물샘이 말라버렸을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상실감이 들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물론 눈물은 나지 않았다. 왠지 눈물을 흘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울어볼 수 있을까, 임희숙의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들어볼까? 그러고 보니 임희숙의 노래를 들으며 울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 두시에 진지하게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들었다. 역시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된장.
눈물연기를 쉽게 해내는 연기자들을 열연한다고 칭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물이 나지 않아 슬픈 가운데 불현듯 생각난 것이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였다. 처음 들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버지에 의해 거세된 소년이 카스트라토가 되어 큰 무대에 서서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울게 하소서!
슬픈 내 운명 울게 하소서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나의 이 큰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울게 하소서, 슬픈 내 운명을!
스테파노 디오니시를 보면서 파리넬리를 떠올렸다. 마음이 살짝 움직였는데, 어쩌면 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감정을 극도로 몰입해서 집중을 했다. 끝내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물샘이 바짝 말라버린 것 같다. 눈을 찔러서라도 눈물을 흘려보고 싶은데 차마 그러진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의 기복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은 신체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울지 못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를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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