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턱 쏜다고 할 때의 한턱의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 한턱의 기준이 된 재판

한턱의 범위

우리말에는 영어로 표현이 어려운 애매모호한 단어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거시기’인데 삼국시대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갈 때 백제군이 사용한 ‘거시기’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오늘 밤, 신라군이 분명히 거시기 할 테니 우리 확실히 거시기 해불자(해버리자)” 당최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결국 후대 언어학자들이 거시기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무엇’으로 정의하였거니와 거시기 말고도 헷갈리는 언어가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턱 쏠게” 혹은 “기분이다 내가 한턱 쏜다”라는 말을 한 번쯤 했거나 들어봤을 것인데 여기서 한턱은 어느 정도의 범위일까?

매사에 궁금한 것이 많고 배움에 목마른 덕구가 한턱에 궁금증이 없을 리 없다. 한턱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던 차 예전에 술값 시비로 인해 소송까지 갔었던 어느 사건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 사건에서 쟁점은 ‘한턱이 어디까지인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사건을 뒤졌다.

지금이 2017년의 끝자락이니 대충 20여 년 이전인 1996년 9월에 있었던 사건이다. 등장인물이 둘이니 편의상 가 씨와 나 씨라 한다. 이들 가 씨와 나 씨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퉜다고 하는데 어느 날 가 씨가 장한 결심을 했다. 가 씨는 더 이상 나 씨와 다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나 씨에게 “내가 오늘 한턱 내겠다”면서 화해를 요청했다.

둘이는 손을 맞잡고-실제로 손을 잡고 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네 술집으로 갔다. 그렇게 술집으로 간 가 씨와 나 씨는 둘이서 자그마치 90만 원어치 술을 마셔버렸다. 여기서 둘은 또 다투게 되었다.

가 씨는 “30만 원 정도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술값을 나눠 내자고 했고, 나 씨는 “애초 한턱내겠다고 했으면 모두 내야한다”면서 나눠 내자는 가 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게 둘은 다퉜고 결론을 내지 못하자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박해식 판사는 졸지에 고민에 빠졌다. 한턱에 대한 정의나 해석을 찾아 사전도 뒤져보고 판례도 찾아봤으나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으니 어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몇 날 며칠을 한턱에 대한 고민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박 판사는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다.

기일이 되자 박 판사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한턱을 내겠다고 한 사람은 처음 주문한 술과 안주 값 20만 원만 부담하고, 추가주문으로 인해 발생한 나머지 술값 70만 원은 두 사람이 나눠서 내도록 하라”

정리하면 가 씨는 한턱으로 20만 원과 추가된 술값 70만원의 절반인 35만원 도합 55만 원을 부담하고, 나 씨는 35만 원을 내라는 주문(판결의 결론)이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턱은 첫 주문의 양’이라는 명확한 기준이 세워졌다. 연말연시, 경기만 좋다면 한창 술자리가 많아지는 시즌이다. 한턱의 범위를 알려줬으니 한턱 쏘는 입장이면 첫 주문을 가볍게 하고, 한턱 얻어 먹는 입장이라면 첫 주문을 아주 많이 하시라. 누구 덕구에게 한 턱 쏘실 분 안 계실까여?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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