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안 되겠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서평을 적어야 마음이 편하겠다. 어쩌다보니 이 책들보다 뒤에 출간된 홍천기 서평을 먼저 적었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홍천기’도 재미있고 좋은 책이지만, 정은궐 작가의 대표작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빠트리는 것은 영 개운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순서는 좀 어긋났더라도 두 작품을 묶어 한꺼번에 독후감을 적는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2부에 해당하니 이 둘은 한 작품으로 봐야한다.
단언컨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재미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유익한 책이다. 내용의 재미도 재미려니와 책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만들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있다는 표현은 칭찬이다. 개인 블로그를 포함해서 이곳저곳에 상당히 많은 서평을 적었지만, 책 편집상태를 칭찬해보기는 처음이다. 볼 때마다 웃음이 나는 것이, 폰트 장난질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출판사 파란미디어에는 정말 재미있는 편집자가 있다.
1부 격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는 성균관의 ‘잘금4인방’이 각종 사고를 치면서 공부하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고, 2부 격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는 공부를 마친 잘금4인방의 규장각 적응기가 담겨있다.
잘금4인방이 누구인지, 왜 잘금4인방으로 불리는지 알면 기본 뼈대는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잘금4인방에 대한 소개를 내 맘과 똑같이 했으니 그대로 소개를 해보면,
대물 김윤희
병약한 남동생 대신 남장하고 과거를 보게 된 처녀 가장. 급제 후 지방 한직으로 부임해 건강을 되찾은 남동생과 자리를 바꿀 계획이었지만, 성적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왕의 눈에 들어 억지로 성균관에 끌려들어간다. 그렇게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윤희는 과거장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선준과 정체모를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그와 한방까지 쓰게 생겼다. 곱상한 외모와는 딴판인 강단 있는 성격덕분에 본의 아니게 각종 사고를 치며 ‘대물 도령’이라 불린다.
가랑 이선준
노론의 거두 좌의정 대감댁의 자랑. 집안이면 집안, 외모면 외모, 인품이면 인품, 학식이면 학식,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한마디로 조선 최고의 신랑감. 이렇게 완벽한 그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베스트 프렌드 대물 도령 때문에 난생처음 머리 싸매고 고민이란 것을 하게 된다. 그것도 자신이 남색일지도 모른다는 믿을 수 없는 문제로.
걸오 문재신
소론의 실세 사헌부 대사헌 댁의 골칫덩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친 바람 같은 사내. 외로워도 화를 내고 슬퍼도 화를 낸다. 좋아도 화를 내고 부끄러워도 화를 낸다. 심지어 대물 도령이 너무 사랑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버럭 화를 내고 만다. 그래서 별호도 ‘미친 말’ 걸오.
여림 구용하
무당무파의 합리주의자. 어떤 순간에도 아름답지 않은 옷을 몸에 걸칠 수 없다는 탐미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심심하면 가엾은 대물 도령을 붙잡고 여잔지 남잔지 확인해 보자며 덤벼든다. 항상 농지거리 아니면 음담패설을 입에 달고 사는 유쾌한 사람이지만 종종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한다.
장안 처녀들이 오줌을 잘금잘금 지린다고 ‘잘금4인방’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소개 글만으로도 재미가 느껴진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이기도 한데, 대충 비교해도 드라마에 비해 책이 백배 낫다. 감칠맛 나는 정은궐 작가의 글 솜씨는 연기로 표현하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뜻이 맞아 두 허리를 합하고, 다정하게 두 다리를 들었네. 움직이고 흔드는 것은 내가 할 테니, 깊고 얕은 건 당신께 맡기겠소.
이것은 여림이 대물 도령을 놀리기 위하여 읊었던 시(詩)다.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려는 여림의 노림수대로 대물은 이 시를 듣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사실 이 시는 ‘가위’라는 제목의 영물시(詠物詩)이다.
有意雙腰合 多情兩脚開 動搖在我心 深淺任君裁
(유의쌍요합 다정양각개 동요재아심 심천임군재)
우리의 친절한 정은궐 작가는 ‘가위’가 허난설헌의 시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작가는 미상이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달아 놓았다. 작가들은 작품 하나를 쓰면서 자료를 수집하는 등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니 졸작이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정 작가가 얼마나 준비를 열심히 했는지 대수롭지 않은 듯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까치에게 이르노니
달이 뜨면 오마고 약속하고 가신 님이면,
님 계신 곳은 산이 높아 달이 더디 뜬다 위로하면 될 터이고,
꽃이 피면 오마고 약속하고 가신 님이면,
님 계신 곳은 봄이 늦어 꽃이 더디 핀다 위로하면 될 터인데,
까치야! 부질 없는 너의 노래로 위로 삼는 탓은
아무 약속도 않고 가신 나의 님을 차마 원망할 수 없음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걸오가 쓴 것으로 나오는 시(詩)이다.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 있을 것인데, 정은궐 작가는 ‘까치에게 이르노니’라는 제목 옆에 괄호로 ‘능운의 시에서 차운하다’라고만 힌트를 남겼을 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차운했다는 능운(凌雲)의 시는 〈대랑군(待郞君)〉이었다. 우리 말로 해석하면 ‘님을 기다리며”쯤 된다.
待郞君 (대랑군)
郞雲月出來 (랑운월출래)
月出郞不來 (월출랑불래)
相應君在處 (상응군재처)
山高月上遲 (산고월상지)
달 뜨면 만나자고 약속하셨지
달은 높이 떴건만 오시질 않네
아마도 생각하니 님 계신 곳엔
아직도 산이 높아 아니 떴겠지
걸오는 “시는 감정을 담는 그릇인데, 남의 글자로 무슨 감정을 얼마나 담는다고, 그건 우리의 감정이 아니다.”라면서 한시가 아닌 언문으로 〈까치에게 이르노니〉라는 시를 지어 대물에게 주었다.
책을 좋아하는 쪽이라면 벌써 읽었을 터이고, 싫어하는 쪽이라도 이 책만큼은 읽어보길 바란다. 읽을 때 대충 이야기만 머릿속에 넣지 말고, 단어하나 문장하나 유의해서 읽다보면 분명 남는 것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거든 내가 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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