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가능해진다, 사례로 살펴본 안락사와 존엄사의 차이

에릭 시걸, 닥터스(Doctors)
에릭 시걸의 닥터스. 닥터스에는 안락사에 관한 문제가 비중있게 나온다.

죽음! 피할 길이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맞이하는 것이 죽음이지요. 바둑이라면 패(霸)라도 내서 살아보겠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에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오늘은 약간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언젠가 꼭 한번 하려고 했던 안락사(安樂死)와 존엄사(尊嚴死)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해 논의를 해봐도 괜찮을 정도로 성숙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늘은 ‘존엄사’라는 키워드가 실검에 떴군요. 23일(오늘)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을 시행, 즉 존엄사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존엄사 때문에 이슈가 되었지만 기실 존엄사는 안락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병자의 상태에 따라 구분을 하지만 죽음을 앞당긴다는 점으로 보자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존엄사와 안락사, 안락사와 존엄사가 어떻게 다를까요?

안락사를 잘 묘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에릭 시걸(Erich Segal)의 ‘닥터스’가 있습니다. 닥터스에는 세드 라자루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바니 리빙스톤과는 하바드 의대 동기인데 심성(心性)이 여리고 착한 의사죠.  그의 고운 심성이 안락사 문제를 야기합니다.

닥터스의 한 부분.

세드 라자루스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의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약물을 주사하여 안락사 시켰다가 결국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3년을 받게 됩니다. 세드가 환자에게 안락사를 하는 과정에 빠트리지 않는 것은 환자의 의사를 확실하게 확인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2010년 10월 7일 우리에게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 작가는 ‘홍반성 루푸스’로 고생을 하다 남편과 동반 자살하였습니다. 최 작가는 “700가지의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완전 건강한 남편은 저 때문에 동반여행을 떠납니다.”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행복전도사 최윤희 작가
행복전도사로 열심히 방송활동을 하던 최윤희 작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듭니다.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환자는 그나마 세드가 안락사 시켰던 굴신도 못하는 환자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비해 존엄사는 완치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는 안락사와 같지만, 병으로 인한 환자의 고통 여부보다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맞이하는 죽음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습니다.

이번 존엄사 문제의 계기가 되었던 ‘김할머니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김할머니 사건’은 2008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할머니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 소송 사건입니다.

당시 가족들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병원에 요청했으나 병원 측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병원 측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거지요. 이에 김할머니 가족이 소송을 제기하여 ‘존엄사’를 둘러싼 본격적인 법정 소송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김할머니 사건은 1심과 2심을 거쳐 2009년 5월 21일 대법원은 ‘존엄사’에 대해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이렇게 안락사와 존엄사는 같은 듯 다른 점이 있습니다. 치료를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존엄사라면, 약물의 투여와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안락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락사는 존엄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엄사 문제는 이번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의 시행으로 어렵게 첫 발을 내딛었으니 한걸음만 더 나아가 안락사 문제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2014년 말기 뇌종양으로 고통을 받는 50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안락사 논쟁을 불러 일으킨 남매가 실형을 선고 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숨진 아버지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동네 의원에서 진통제만을 처방받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팩트입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죽여 달라”고 지속적으로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불가능한 피의자의 주장입니다.

“아버지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사는 걸 보며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라도 아버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며 눈물 흘렸던 이들 남매에게 세드 라자루스 같은 의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위험한 생각인가요?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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