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신의 돈을 주면서 뭐든 해보라 합니다. 그런데 줄 때 똑같이 주질 않고, 한 종에게는 5달란트를 또 한 종에게는 2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명에게는 1달란트를 줍니다.
달란트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직장인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1달란트에 5천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에게 돈을 받자마자 그것으로 뭔가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두 달란트의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찌된 셈인지 그 돈을 땅에 파묻어두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자신이 남긴 이윤을 주인에게 드렸고,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던 것을 꺼내어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전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이렇게 원금을 보전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꾸짖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그 종을 무익한 종이라며 집에서 내쫒아 버립니다.
전 솔직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게으르고 무익한 종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원금이라도 챙겼으니 다행이지 않나 싶은 원망도 들었습니다. 이 험한 시대에 투자한 원금이라도 챙긴 게 어딘가요? 주인이 너무 매몰차지 않나 싶은 저항감이 들더군요.
이 무익한 종에 대한 변명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이 종은 왜 주인이 준 돈을 땅에 파묻었을까? 그냥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서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땅에 묻었다가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줬을까?
일단 섭섭하기도 하고 좀 화가 났을 겁니다. 다른 종들은 저렇게 많이 주면서 나에게는 왜 이리 적은 금액을 주는가? 왜 이리 날 차별하는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가? 상대적인 박탈감과 비교에서 오는 자괴감 뭐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많은 것을 받은 종들의 모습에 또 빈정 상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보란 듯이 옆에서 자기가 받은 것을 가지고 뭘 해야 할지 고민이라며 은근히 자랑질을 해댑니다. 얼마나 꼴 사나워보였겠습니까? 이것들이 누굴 놀리나? 그러면서 자기가 가진 한 달란트를 보며 자조적인 한숨을 내쉽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가진 놈들도 이것 가지고 뭘 하나 고민하는데, 난 겨우 한 달란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그냥 술을 마셔버리든지 아니면 저번에 봐뒀던 스포츠카 한 대 뽑아서 신나게 놀아볼까? 카지노라도 가봐? 아님 로또를 살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하고 뭘 해도 앞의 두 종보다 더 잘 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미 시합을 하기 전에 져버린 것이죠. 그리고 주인의 무서운 얼굴이 생각나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자”
우린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다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지 지면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생으로 전락해버리기에 어떻게 하든 이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1등을 해야 하고, 이겨야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라 아이들에게 ‘무조건 이겨야 한다, 경쟁에서 앞서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기는 교육을 하면 그 속에서 지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며, 이런 교육을 하는 학교는 극소수의 앞선 자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 외의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패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학교가 어느 새 패배자 양성소가 되어 버린 것이죠.
이런 패배자 양성소에서 자란 아이들은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무익한 종처럼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자’ 이런 마음으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비교할 것도 없으니 최소한 패배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예전 스웨덴의 교육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스웨덴 교육을 접할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에게 “왜 부자가 되려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야 더 많은 이득을 얻고 그래서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저변에 깔려 있고, 우린 이것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아니어도 사는데 불편 없이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 의아한 것이죠.
그만큼 그 사회는 사회보장과 복지가 잘 되어 있습니다. 남보다 뒤떨어져도 크게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그래서 남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를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린 흔히 스웨덴의 세금제도를 살인적이라고 혀를 내두르고 있지만, 스웨덴 국민들은 이를 위해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자신들이 낸 세금이 이렇게 쓰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죠.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는 저와 같은 비판을 위해 만든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핀트가 어긋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천국을 설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이렇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또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래서 자신이 가진 한 달란트가 소중하고,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꿈을 꾸며, 이 꿈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한 달란트 받았기에 무익한 사람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한 달란트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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