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키츠역에서 도쿄까지 가는 길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님에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은 표 하나를 구매해서 그것만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환승할 수 있지만, 일본은 환승할 때마다 표를 구매해야 해서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무인발급기에서 표를 구매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핸드폰에 도쿄지하철 앱을 다운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역이 한글과 일본어로 선택해서 볼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에 해당 목적지의 글자를 찾아 표를 구매할 수도 있고, 환승역 검색, 경로 검색 등이 모두 가능하다.
이번 도쿄 나들이에는 일본인 친구가 동행해준 덕분에 쉽게 도쿄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이 앱을 이용해서 나홀로 다시 한 번 도쿄를 찾아가 볼 생각이다.
이번 도쿄나들이에 함께 동행해준 일본인 친구는 ‘사와코’상이다. 사와코상은 일본역사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을 너무도 좋아해서 8년째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고, 한국 방문도 수차례 했다고 한다.
사와코상의 통·번역 수준은 상당히 높다. 이번 신아키츠 콘서트 때도 나의 통역을 맡았다. 사와코상이 서울은 너무 많이 가봐서 이제는 다른 곳을 가보고 싶다 하여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고궁을 좋아해서 고궁이 있는 지방을, 특히 경주를 가보고 싶다 한다. 다음 한국 방문 때는 나와 함께 경주를 가보기로 했다.
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유적지만 휙 둘러보고 떠났던 경주를 외국인과 함께 그것도 역사적으로 아픈 과거를 함께 품고 있는 일본인과 방문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들지 사뭇 궁금해진다.
사와코상과 처음으로 들른 곳은 신주쿠에 위치한 ‘블루보틀’이라는 카페이다. ‘도쿄에서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면 꽤 많은 블로그에서 후기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인기 있는 곳이기에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을까 궁금했던 곳이라, 식전임에도 불구하고 카페를 들러보았다.
인기를 실감할 만큼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스카이블루 색상의 병이 앙증맞게 그려진 심볼 마크가 상큼하게 느껴진다.
우리도 순서를 기다려 브랜드 커피(일본은 브랜드와 아메리카노 두 종류의 커피가 있다)와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주문하고 나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매장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다.
아! 저거구나! 저게 블루보틀의 매력이었구나!
길고 넓은 테이블에는 여러 대의 핸드드립용 서버가 있었고, 한 명의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모든 커피를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내려주기 때문에 주문한 후 커피를 받기까지 보통 10~15분 정도 걸린다.
핸드드립 커피가 맛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기에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맛에 정성을 더해 커피를 제공하는 블루보틀만의 매력이 인기의 비결이 아닌가 싶다. 과연 맛이 어떨지 급 궁금해졌다. 내가 주문한 카페라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카페라떼는 기계로 추출한 커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음! 맛있다! 쓴맛과 우유의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맛. 내가 좋아하는 카페라떼 맛이다. 커피와 우유의 배합이 잘못되면 우유 맛만 나든지, 커피 맛만 나든지, 아님 이도저도 아닌 밍숭맹숭한 맛이 나기 쉬운게 카페라떼라 내가 인정하지 않은 곳에서는 카페라떼를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블루보틀의 명성을 믿고 주문한 나의 결정은 성공이었다. 사와코상이 먼저 핸드드립커피를 마셔보았다. 다음 내가 마셨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눈만 껌벅였다. “와! 진짜 맛있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커피 하나로도 이렇게 기분이 업 될 수 있다니.
처음 방문한 곳에서 기분이 좋으니 오늘 하루 기분이 좋겠다며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방문지는 메구로 엔죠이 호텔. 우리는 호텔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을 들러 전시회를 둘러본 후, 점심을 먹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온통 일본 전통의 문양과 옛 모습이 담긴 그림들로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다. 전시관을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 당시 주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자개장이 엘리베이터 문에 붙어 있었다.
입을 쩍 벌리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카메라를 안 켤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 사방, 그러니까 나를 둘러싼 4면과 천장까지 모두 5면이 자개로 뒤덮여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소중히 아끼며 닦고 또 닦았던 그 귀한 자개장이 아니던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뜯어서 집으로 가져가신다 하셨을 지도 모른다. 암튼 자개도 실컷 구경하고 전시회도 잘 둘러본 우리는 호텔식으로 점심 만찬을 즐기며 일본과 한국의 문화교류를 이어나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우리가 나선 곳은 도쿄타워. 지하철로는 많이 걸을 수 있다하여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때 사와코상이 한마디 거든다. 한국의 버스는 너무 빠르고 거칠어서 타기 힘들다고. 하지만 일본 버스는 천천히 가면서 기사님들이 친절하니 타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아. 순간 너무 창피했지만 바로 인정했다. 창피하지만 사실이니까.
두 번의 일본 방문 중 처음으로 타는 버스이기도 하고 좀 전에 사와코상이 말한 바가 있기에 기대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정말 부드럽게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마이크를 이용해 올라오는 승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모두들 천천히 차분하게 버스에 오른다. 출발 또한 부드럽다.
한국 버스처럼 운전석 오른편에 전광판으로 정류장을 안내해주지만 이곳은 기사분이 정류장마다 마이크로 또다시 방송을 해준다. 그래서 정류장을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릴 때도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편안하게 기다려준다. 칭찬할 만한 일본 버스문화이다. 우리도 이런 부분은 본받았으면 좋겠다.
도쿄타워 정류장에서부터 도쿄타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국의 N타워만 생각하고 높은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도심지에서 약간 올라간 위치에 타워가 있다니 조금은 의아했다.
타워 들어가는 곳 주변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줄을 서있는가 보니 크레페를 파는 곳이었다. 광고 속 크레페가 먹음직해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도 줄을 서며 사먹는 것을 보고 타워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사먹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타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 N타워하고는 요금이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나 모두 비슷했다. 그러나 타워 전망대를 들어서자마자 속으로 삼킨 한마디.
‘우리 N타워가 훨씬 낫다!’
정말 여러모로 훨씬 나았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보이는 부분은 유리창에 그대로 따라 그려 위치 또는 그 지역과 유적지 등에 대해 설명해놓았지만, 도쿄타워는 그런 설명이 없어 저기가 어딘지 사와코상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그날따라 전망대 반쪽을 공사하느라 막아놓아서 신주쿠 쪽은 보지도 못하고 반만 구경하고 내려왔다. “그럼 전망대 요금 반을 깎아줘야 하는거 아냐?” 나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물론 속으로.
그래도 도쿄옆에 붙은 바다도 구경하고, 도쿄 전경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아까 올라가기 전에 벼르던 크레페 파는 곳으로 갔다. 이미 점심에 먹은 만찬으로 뱃속은 가득 찼으므로 가장 양이 작고 덜 단 것으로 주문했다. 비쥬얼이 상당했다. 큰 기대감을 가지고 한 입 베어 문 순간, 크레페를 통째로 던져버릴 뻔했다.
여지껏 크레페 위에 장식한 하얀 덩어리가 생크림이 아닌 아이스크림인줄로만 알았던 것. 생크림을 수저로 푹 떠서 한 입 가득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보같이 저게 아이스크림이라면 왜 녹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 라는 생각은 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지.
옆에서 사와코상은 웃겨 죽고, 나는 느끼해서 커피만 찾았다. 커피 파는 곳이 없어 정류장까지 내려오다 보니 입안이 진정되는 것 같아 우선 버스를 타고 마지막 코스인 도쿄역으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려 바라본 도쿄역은 마치 서울시청과 서울역을 오물조물 합쳐서 길게 늘려놓은 듯 보였다. 도쿄역을 바라보며 갑자기 일제강점기 시대의 우리나라를 상상하게 됐고, 주변의 일본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내가 마치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아니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비참한 기분이었겠지.’
사와코상이 우체국에 볼일이 있다하여 함께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우체국 안에는 내가 어릴 때 편지봉투위에 우편번호 앞에 쓰던 글자가 있었다. 일본에 오면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글자나 물건들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이 추억을 담은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아픈 결과임에도.
도쿄역와 우체국 그리고 쇼핑몰에 장식해 놓은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를 실컷 구경하고 우리는 신아키츠역을 향해 지하철에 올랐다.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해준 사와코상이 너무 고맙고 귀하게 느껴진다. 메신저에서든지 직접 만날 때든지 늘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는 사와코상.
한국을 너무 사랑해 한국어 공부에 자신의 시간을 다 바치고, 한국의 고궁을 꼭 보러 오겠다고 다짐하는 사와코상을 보면서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가 일본과 한국이 아닌 다른 국적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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